30대 첫해가 끝나간다. 너무 느긋한 성격을 고쳐보려고 더 빨리 걸어보자고 올해는 성장의 해로 정했다. 말이 씨가 된건지 느긋할새 없이 한해가 지나갔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각잡고 앉아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반성(reflection)을 하는편인데 올해 가장 최근은 자기반성이 5월? 정도인것같다.
그나마 아이폰 사진첩엔 뭔가가 남아있을것같아 들여다보는데 올해는 사진도 별로 안찍었다. 대신 SNS를 보거나 아티클을 보면서 찍어둔 스크린샷이 1000장은 훌쩍 넘었다. 스스로 성장의 해라고 정해서 그런가. 대부분이 업무 관련, 커리어 인사이트, 아이데이션하느라 찍은 것들이었다.
어차피 덮어놓고 캡쳐만 하다보면 보지도 않는 것. 그래서 스크린샷을 천천히 보며 올해를 정리해보기로 했다.

연초를 여행으로 시작했다. 나고야의 친구집에서 일주일동안 있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푹 쉴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러닝, 마트에 가서 장봐와서 아점먹고 집안일, 낮에는 동네구경 카페구경, 저녁엔 퇴근하는 친구와 선술집에 갔다. 3-4일 규칙적으로 놀았는데 효과가 이렇게 좋을줄은 몰랐다. 마지막 날 후지산에 갔다가 캠핑장에서 가만히 먼(후지)산을 봤는데 확실히 머리가 맑아졌구나하고 스스로 느꼈다.
귀국할때즈음 코로나가 터지는걸 보면서 타이밍하나는 정말 잘 잡았다고 생각했다. '1년에 한두번은 꼭 해외를 나가줘야해'라고들 하는 사람이 많던데 그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해외에 한번 나가면 마치 도망쳐온 사람처럼 한국에 두고온 일들에 신경을 끈다.
최선을 다해 쉬면서 재충전하는게 올해는 가능했는데, 2021년에는 어떤식으로 또 추진력을 모을지 고민해야할 것 같다. 내년은 더 빡셀테니까.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다. 새로운 회사로 왔다는점 보다 광고대행사로 돌아왔다는게 더 중요하다. 이전 회사에서 영업, IR 등 새로운 일을 경험하면서도 즐거웠지만, 내가 무슨일을 해야 재밌게 오래 일할 수 있는지 더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무언가를 만들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데에서 보람을 느낀다. 대행업 특유의 고달픔도 있지만, 프로젝트를 하나하나 클리어해나가고 결과를 지켜보는 데에서 성취감을 얻는다.
단지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게 다가 아니었다. 나의 main job을 통해 중심이 잡히고 나니까, 커리어 고민이 훨씬 편해졌다. 이 일을 중심으로 어떤 형태의 커리어를 만들 수 있을지, 지금으로부터 어떻게 커리어를 확장할지 주도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모두가 기생충을 찬양하고 있을때, 오스카에서 주목을 받은 작품이 있었다. <조조래빗>으로,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는 각색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기, 히틀러 소년단에 속한 어린아이 조조와 유대인 엘사의 이야기를 담은 블랙코미디 영화이다. 여기서 감독은 주인공 조조가 만들어낸 상상속 히틀러로도 등장한다.
유대인이 무자비하게 죽어나가고 아이들이 전쟁에 동원되는 시기의 이야기를 코미디로 풀어내는 감독의 능력이 탁월했다. 살벌한데 따뜻해지다가도 웃기다가 처참하다가 마지막엔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을 들으며 몸을 들썩들썩하게 된다. 정치적인 이슈를 건들때에는 날카롭고, 어떤 대목에서는 감성을 과감하게 자극하는것에 확 매혹되었다.
스타워즈의 연출을 새롭게 맡았다고 하던데 기다리고 있다.

매번 새로운 과제가 주어지고 새로운 솔루션을 제시해야하는 일이어도 익숙해져버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기계적으로 루틴한 업무를 처리하고, 하다못해 아이디어도 숙제해가듯 내가는 시기가 왔다. 그렇게 생각없이 일을 하다 퇴근하면 집에선 아무것도 안하고 공허함만 느끼고 있었다. 슬럼프가 계속되자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했던 일들에서 실수가 나오기 시작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것도 고통스러워졌다.
그래도 나이가 좀 들었다고 이런 시기가 오면 상황을 객관화하려고 든다. 소용은 없었다. 처음에는 오롯이 괴로워하고 지나가게 할지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쓸지 생각했는데, 그건 점점 의미가 없어졌다. 그냥 힘들었다(ㅋㅋ). 조금 나아지는듯하다 또 난이도 높은 프로젝트에서 고전하다보니 어느새 10월이 되어 있었고 그즈음부터는 좁았던 시야가 조금씩 넓어졌다. 돌아보니 사진첩에서도 이겨내려고 업무관련 아티클도 읽고 일기도 썼고 오정세 배우의 한마디에 울림을 얻기도 했다.
유독 길었던 슬럼프가 지금은 얼추 지나간 것 같다. 지나간 뒤 내가 잘 이겨내고 성장했구나 싶은 단계까지는 오지 못했다. 어차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게 슬럼프인 만큼 다음번엔 좀 더 큰 성장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를 위해 조바심은 좀 줄이고. 자존심을 버리고 자존감을 높여보려고 한다.

올해 마지막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니 벌써 겨울이었다. 횟수를 세어보니 어려운 시국에 감사하게도 6개의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었다. (사실 정신없어서 그렇게 많이 한줄도 몰랐다.) 얼마전에는 유튜브를 보다가 내가 만든 광고가 뜬 적이 있다. 화장품이라서 그런지 게재지면을 확인할 때가 아니라 타겟팅이 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 내 광고를 사람들이 이런식으로 보긴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던 순간.
'성장의 해'로 정해놓고 시작한 올해는 struggle의 해였다. 부딪히고 성장하는 과정이 쉽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방식이 통하지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의 방식이 통하고 별다른 고난이 없는 상황이 comfort zone이라면 struggle은 그 밖에 놓이는 순간이다. 좌절, 불편함, 두려움 등 스트레스가 넘치는 순간이 지나면 그제서야 조금 성장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한다.
올해는 comfort zone밖에 놓인 와중에 소홀히 한게 많았다. 인사이트를 축적하는 준업무적인 부분부터, 내 건강을 돌보는 일, 가족과 잘 지내는 일 등을 등한시 했다. 내년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시야를 넓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사진은 아버지의 깨알 모니터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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